창세기 3장: 에덴의 동쪽

해설:

창세기 2장과 3장 사이에는 거대한 시간적 간격이 있습니다. 성경 특히 구약성경을 읽을 때 그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에덴에서의 완전한 평화와 행복이 얼마간 지속되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3장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만끽 하면서 낙원을 즐겼을 것입니다. 그 ‘무한자유’에 권태를 느낄 즈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나무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생각이 그 나무에 미치고 흘끔흘끔 쳐다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그 나무에 대해 물었을 때 하와가 답한 말에 그 욕망이 암시되어 있습니다(3절).

아담과 하와의 죄는 사탄이 뱀을 통해 유혹했을 때 실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죄를 향한 욕망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뱀이 접근했을 때 이미 그들의 마음은 유혹에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여전히 인간의 마음을 속이고 유혹하기 위해 “우는 사자와 같이”(벧전 5:8) 찾아 다닙니다. 하지만 사탄은 우리에게 고삐를 씌워 죄를 범하도록 강제하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죄를 향한 욕망이 있기에 사탄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정체와 그것을 에덴에 심어 두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 그에 대한 ‘정답’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서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추론해 볼 수는 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좋은 나무처럼 생각됩니다.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조물로서는 선과 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피조물로서 판단할 수 있는 선은 다만 ‘지금’ ‘여기서’ ‘자신에게’ 유익해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선이 아닙니다. 진정한 선은 지금 뿐 아니라 미래에도, 여기서 뿐 아니라 저기서도, 자신에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일 뿐 아니라 진짜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절대적 선과 악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리를 탐한다는 뜻입니다.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원한다는 뜻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지키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에덴의 삶은 그분이 창조하신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모시고 아래로 모든 피조 생명들을 관리하며 마음에서 느껴지는 대로 행하면 그것이 의가 되고 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하나됨으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묻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마음 끌리는 대로 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자 아담과 하와 사이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다른 피조 생명의 관계도 깨졌습니다(14-19절).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선한 질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그랬기에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서”(7절)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 몸을 가렸고, 하나님의 질책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돌렸습니다(12-13절). 서로를 한 몸으로 인식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다른 존재로 파악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피조물로서 스스로의 생각으로 선악을 판단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선과 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선을 위해 살아야 했습니다. 그 결과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이 인간 실존의 조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면서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2:17)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은 “가죽옷”(21절)을 만들어 입혀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 지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막으시고(24절) 에덴의 동쪽으로 쫓아 내십니다. 죄성을 가진 존재로서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누구나 에덴의 동쪽 즉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한 상태에서 살아야 했고, 생명나무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묵상: 

창세기 3장의 타락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의 사건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원죄로 인해 깨어진 우주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죄를 용서 받고 또한 죄성을 치유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합니다.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 1:12)는 말씀은 3장의 타락 사건을 되돌린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피조 생명과의 관계가 모두 회복됩니다. 더 이상 깨어진 관계 안에서 투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은총 속에서 서로 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에덴의 동쪽에서 살고 있던 우리는 다시금 에덴으로 회복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생명나무에 이르지 못하도록 세워 두신 그룹과 불칼을 제거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아침, 에덴의 동쪽에서 희망 없이 살던 우리를 이 자리로 옮겨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4 thoughts on “창세기 3장: 에덴의 동쪽

  1.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며 부부의 갈등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말씀을 해 주시는군요 주님.
    우리 주변에는 사악한 뱀이 늘 유혹을 하여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게하고 자유롭게 보이는 무절제로 이끌고 있는 현세에서 주님의 날씀을 꼭 붙들고 묵상하며 주님의 길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이제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지언정 영혼만은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원죄로인한 부부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창조될 당시의 부부애를 회복하게 해 주시어 현실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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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모든 것이 달라지는 순간입니다. 허기가 생겨 열매를 먹은게 아니라 기대 때문에 먹었습니다. 몸을 가리고 싶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무서워 숨고 싶습니다. 자기가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남의 꼬임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여자에게 이름을 주어 나와 구분이 되게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창세기 3장에 이르니 가슴이 철렁 내려 앉습니다. “있을 때 잘 해” 인사가 우스개 인사로 시작했을지라도 사람살이에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또 있을까요. 없어지고 난 뒤에야 있었던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슬픔의 탄생을 오늘 목격합니다. 아담은 이제부터 땅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다시 창세기인 셈입니다. 우리가 아는 인생사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아담의 입장에서보면 아버지가 되고 주인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얻은 독립은 하나님과 바꾼 댓가가 된 셈입니다. 말 그대로 자립해야 하는, 모든 것을 자기가 알아서 감당해야 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동산에서 살 때 아담은 하나님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는 특권을 가졌던 아담이 하나님은 뭐라고 불렀을까요.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겠지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는, 모든 것이 그 상태 그대로 완벽한 “낙원”에서 사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사는 지금 여기도 참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곳이면 에덴입니다. 아담은 에덴의 동쪽으로 떠났어도 우리는 에덴을 향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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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멀고 좁고 험한길에서 방황하는 저희들에게 진리와 생명으로가는 길로 인도하시는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 숨쉴때까지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않게 한눈팔지말고 바른길을 걷게 도와 주십시오. 정신 바짝차리고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주님따라가는 새해가 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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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얼마전 읽었던 James Dunn의 말이 생각납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입니다. 고전15:21-2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James Dunn은 기독론 중에 Adams Christology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아담은 죽음을 가져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생명을 가져 오는 제2의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즉 Life giving Adam. 할렐루야! 주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생명,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또한 아담과 하나님, 아담과 이브의 관계에서 죄에 대한 개념을 Paul Tillich는 분리 즉 separation으로 재해석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리, 그리고 자기 자신 속에서 자기 자신과의 분리 그리고 자기 아내 이브와의 분리현상입니다 첫째를 Ontological separation 즉 존재론 적인 분리, 둘째를 자기 자신속에서 자신과의 분리즉 심리적인 분리 Psychological separation. 그리고 자기 아내 즉 자기 이웃과의 분리. 사회론적인 분리 Sociological separation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사건으로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자기 자신안에서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고 따라서 이웃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해설을 좋아합니다.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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