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2장: 용서는 과정이다

해설:

7년 동안의 기근은 가나안 땅까지 덥쳤습니다. 견디다 못한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풍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막내 베냐민을 제외한 열 명의 아들들을 이집트로 내려 보냅니다. 그렇게 하여 이집트의 총리로서 외국인들에게 곡식 파는 일을 맡아 보고 있던 요셉은 형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요셉은 그들을 알아 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시간적으로 20년이나 지났고 요셉이 화려한 이집트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압도하고 있던 두려움도 동생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 앞에 업드려 있는 형들을 보면서 어릴 때 꾼 꿈을 기억했습니다. 그 때 요셉은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이 의도한 것도 아닌데 그 꿈이 20년 후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앞에서 신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마음 상태를 알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첩자로 몰아 세웁니다. 그러자 형들은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설명합니다. 요셉은 곧이듣지 않는 척하면서 결백을 증명할 방법을 제시합니다. 아홉 형제를 인질로 잡아 두고 있을 테니 한 사람이 가서 막내 동생을 데려 오라는 것입니다. 형들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요셉은 그들을 감옥에 가두어 둡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 했고 노예로 팔아 넘긴 일에 대해 형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아 보려 했던 것입니다. 형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사흘 동안 요셉은 마음을 바꾸어 한 사람만 인질로 잡아 두고 아홉 형제는 고향으로 보내기로 마음 먹습니다.

사흘 후에 요셉은 형들을 끌어 내어 새로운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러자 형들은 요셉이 알아듣지 못하는 줄 알고 과거에 요셉에게 행한 일에 대해 뉘우칩니다. 큰 형 르우벤이 동생들의 잘못을 책망합니다. 그는 동생들 몰래 요셉을 살려 내려 했었습니다. 요셉은 그제서야 르우벤이 그런 마음으로 자신을 구덩이에 넣자고 제안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요셉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울음을 쏟아 놓습니다. 형들의 진실한 뉘우침 그리고 르우벤 형의 마음을 알고는 그의 마음에 뭉쳐 있던 분노가 녹아 내린 것입니다. 그 눈물에는 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감정을 추스린 다음 요셉은 형들에게 다시 와서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 두고 다른 형들에게 원하는 대로 곡식을 제공해 줍니다. 요셉은 종들을 시켜 받은 돈을 곡식 자루에 넣어 보내게 합니다. 그들이 그 사실을 안 것은 하룻길을 간 다음의 일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질려 집으로 돌아가 야곱에게 자초지종을 다 말씀 드립니다. 그런 다음 곡식 자루를 풀어 보니 자루마다 그들이 지불한 돈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들은 영락없이 함정에 빠졌고 첩자의 누명을 벗을 길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 이어 시므온도 잃어 버렸다고 슬퍼합니다. 그는, 베냐민은 절대로 이집트로 데려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르우벤이 두 아들의 목숨을 걸면서 베냐민을 꼭 다시 데려 오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묵상:

요셉은 20여년 동안 형들에 대한 분노를 마음에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가 인생의 바닥에 내쳐진 다음 하나님을 만났고 그 결과로 새 사람이 되었지만,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 그리고 노예로 팔아 낯선 땅에서 온갖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로 인한 분노는 그대로 있었을 것입니다.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영화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 분노는 해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노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분노를 만들어 낸 당사자와 화해가 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요셉은 20여년 후에 자신 앞에 업드려 떨고 있는 형들을 보면서 어릴 적 꿈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전율 했지만 분노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습니다. 20년 동안 뭉치고 뭉쳐서 금강석처럼 굳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분노의 돌에 작은 균열이 생긴 것은 형들이 자신에게 행한 일에 대해 뉘우치는 말을 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또한 자신을 구덩이에 넣어 굶어 죽게 하자고 제안했던 르우벤 형의 진심을 알았을 때 그 분노의 돌덩이에 금이 생겼습니다. 그는 참을 수 없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 통곡으로 인해 분노의 돌덩이에 생긴 균열이 더욱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요셉은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에 숨구멍이 뚫리는 듯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 응어리가 모두 풀리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더 많은 눈물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단단한 분노의 돌덩이에 첫 번째로 생긴 균열의 의미는 매우 큽니다. 

얽히고 설킨 인간 관계에서 분노를 느끼는 것은 때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분노를 품고 사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숨통을 조이는 일입니다. 용서는 스스로 조이고 있는 숨통을 풀어 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첫 걸음을 떼는 것이 중요합니다. 

7 thoughts on “창세기 42장: 용서는 과정이다

  1. 지난날에 고의적으로, 실수로, 또 모르고 이웃에게 잘못한
    죄를 깨우쳐 주십시오. 주님과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이웃의 잘못을 십자가 밑에서 무조건 용서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생각납니다.
    말씀따라 이웃을 사랑으로 품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손바닥보다 큰 구름을 보여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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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하나님이 늘 요셉과 함께해므로 요셉이 이집트에서 성공하지만 자기를 미워하고 팔아 넘긴 형제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가슴 속에 겹겹히 쌓아 있다가 막상 자기 피붙이들을 만나니 분노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요셉을 통해 형제의 심오한 정을 느끼는 아침입니다.
    늘 형제간에 있는 사소한 다툼이 때론 용서받지 못할 죄를 불러오고 그로인해 격어야 한 야곱형제들의 갈등을 통해 내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나도 삶에 허둥대다보니 늘 형제자매들을 소홀히 하며 잊고 지내는 내 자신을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회개하는 아침입니다, 용서는 하나의 과정이라 하시는 주님, 응어리진 모든 분노를 용서로 시작하게 해 주시고 용서를 통해 마음에 평화가 자리잡게 해 주십시요.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대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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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요셉이 만일 그의 형제들이 그들의 한일을 뉘우치는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과연 용서했을지 궁금해하며 이른아침 묵상해 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 분노가 생기면 어렵지만 본인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 상대방에 대한 용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억울한 일 자체를 가능한 빨리 잊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하루 한말씀 진도를 늦게 시작하다 보니 창세기1장부터 읽어오는 과정에 있습니다. 생전 처음 읽어보는 성경이다 보니 의문사항도 생기고 해서 몇자 적어 봅니다.

    어제(2월 17일) 설교 “사람은 바꿔 쓰는 것이 아니다” 에서도 일부 언급 되었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이혼에 관한 율법이 남성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왜곡되어 이혼의 권한이 남성들에게만 있었던것 같고, 창세기 3장 16절에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라는 구절은 선악과를 따먹는 잘못을 아담과 하와가 똑같이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 사이에 소위 “갑을관계” 를 설정하면서 현세까지 이어지는 남녀차별의 근본”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주님의 진정한 의도는 무었일까요?

    또한 창세기 4장에 주님이 아벨의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의 제물을 반기지 않으신 이유가 뭘까요? 단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반기지 않으신 것에 대하여 가인이 몹시 화를 내고 얼굴빛이 달라진 것에 대해 책망하시지만, 정작 왜 가인의 제물을 반기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설명, 즉 어떻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것 같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첫사람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굴레에 빠트렸으나, 창세기 5장에 보면 본인과 자식들은 무려 천년에 가까운 장수를 누렸고, “마지막 아담” 이라 칭하여지는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 구원받은 현재의 인간들은 100년도 못살고 단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묵상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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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경을 처음 읽으면 수 많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질문들 중 어떤 것들은 성경을 알아가면서 저절로 해결되는 것들이고, 또 어떤 것들은 좀처럼 답을 찾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주는 책이 아닙니다. 또한 많은 질문을 던지는 책입니다. 그렇기에 그 질문들을 마음에 품고 계속 말씀을 묵상해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공간은 묵상을 나누는 공간이기에 형제님의 질문에 답하는 일은 삼가하겠습니다. 대신, 따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만들겠습니다. 형제님의 진지한 묵상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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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플에 감사드립니다. 원래 묵상이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붙들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같은 초보들은 성경을 읽다보면 여러가지 질문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묵상과정의 부산물로 저 자신에 대한 질문들로 이해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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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오늘 본문에서 세 사람의 심정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요셉과 르우벤과 야곱에게 큰 일이 일어납니다. 20여년 동안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한 죄를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총리까지 되어 더 할 수 없는 성공을 누리게 되었지만 고향과 식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씻어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형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도 상당했겠지요. 막상 자기 앞에 고개를 숙이고 먹을 것을 구하는 형들을 보니 이제야 자기 꿈의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의 꿈을 잘 해석해 주던 요셉이 비로소 자기 인생을 꼬이게 한 꿈의 실타리를 풀게 되었습니다. 르우벤의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보너스까지 얻은 셈입니다. 그 보너스는 완전한 용서를 가능케 합니다.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과 평생 척을 지고 “웬수만도 못한” 아들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늙은 아버지에게 뭔가 해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자기 아들들을 바쳐서라도 자신의 진심을 알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야곱도 또 한번 두려움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됩니다. 또 한 차례 큰 변화가 올 것을 예감합니다. 라헬의 흔적이라곤 이제 베냐민 뿐인데 요셉을 잃은 데 이어 베냐민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르우벤에게 베냐민을 맡겨야 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되었습니다. 굶어서 죽는 것과 상실감으로 가슴이 무너져 죽는 것 밖에는 선택이 없어 보입니다. 야곱의 슬픔이 성경책 페이지 바깥으로 넘치는 듯 합니다. 인간의 감정들이 다 녹아 있는 것 같은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좋을 때에도 무서울 때에도 잘 하고 있을 때에도 실수를 저지를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지요. 나와 계신다고 믿다가도 어려운 일 앞에서는 하나님이 잘 안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나와 안 계셔서 어려운 일이 온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숙제를 푸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내 중심에 계시면 멀리 길게 볼 수 있는 마음의 눈도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인생을 이해하는 지혜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 어디 계시나요. 제 마음 한 가운데 계시나요…오늘도 하나님을 꼭 품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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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요셉과 형들의 화해의 과정이 놀라운 극적 효과를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옛날에 읽었던 훌러신학교 교수였던 스미드가 쓴 용서의 다이나믹에 대한 글이 생각납니다. 용서는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화해의 효과를 얻으려면 용서하기 어려운 관계의 위기를 경험할때 오는 선택에서 진정한 용서의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도 바로 그러한 다이나믹한 역하를 주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는 값싼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값비싼 위기의 과정 속에서 먼저 요셉의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형들이 죄책감의 심각한 위기를 당하는 것을 보고 요셉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간 관계에서도 그런 거 같습니다. 그 고통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기 아들의 죽음의 고통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 이것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일인지 모릅니다. 일방적인 분노와 억울함의 노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무너져 내릴때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 같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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