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장 1-14절: 나귀를 타신 이유

해설:

예수님의 일행은 드디어 시온 산 맞은 편(동편) 올리브 산에 이릅니다. 그곳에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 둘을 보내어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끌어 오게 합니다. 예수께서 미리 어떤 사람을 통해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2-6절). 제자들은 나귀 등에 겉옷을 걸쳐 놓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나귀에 올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가려면 동편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 문은 ‘황금문’이라고 불리는데,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그 문을 통해 들어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 했을 때 그 문을 돌로 막아 버렸고 지금까지 그 문은 막혀 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속히 임하셔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를 염원했습니다. 그들 중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황금문을 통해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위해 겉옷을 벗어 길에다 펴기도 하고 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기도 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대관식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마침내 다윗 왕국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암송하고 기도했던 시편 말씀 즉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9-10절)라는 말씀으로 그분을 환영합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메시아로서 그분은 그곳에서 권력자들에게 넘겨져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임을 상징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과 무리는 나귀를 타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나귀가 백마로 보였고 그들이 깔아 놓은 겉옷과 나뭇가지는 레드카펫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위대한 다윗 왕국을 회복하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분은 곧바로 성전으로 향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인 이유는 성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구석 구석을 다니면서 살피십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베다니로 돌아오십니다.

다음 날 아침, 예수님은 다시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식전이어서 시장하셨던 예수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다가가십니다. 하지만 그 나무는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습니다. 아직 “무화과의 철” 즉 열매가 익을 때는 아니었습니다만(13절), 설익은 것이라도 열매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1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보는 순간 예수님께는 형식만 무성할 뿐 거룩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전이 생각 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난 밤 베다니에서 성전에서 본 것들을 생각하면서 잠을 못 이루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밤새도록 기도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일찍 일어나셔서 아침 식사도 하지 않으시고 성전으로 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형식만 무성한 성전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할 참이었습니다. 그렇게 비장한 마음으로 가는 길에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셨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곧 성전 종교에 대한 저주였다 할 수 있습니다.

묵상:

우리는 ‘나귀를 타신 메시아’를 믿는 사람들이며 ‘죽임 당하신 어린 양'(계 5:6)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그 모든 것을 비우시고 가장 낮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희생 당하신 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낮아져서 섬김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 섬김과 희생이 죽음을 요구한다면 그것까지 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한계이지만, 하나님에게 죽음은 하나의 단계일 뿐입니다.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피어나는 단계입니다. 그렇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아무 조건 없이, 아무 한계 없이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메시아로서 그 길을 끝까지 가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길로 부르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옛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높아지기를 원하고 군림하기를 원하며 부리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8:34)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예수를 믿기에 예루살렘의 군중들처럼 오늘 우리도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된 욕망을 만족시키려 합니다. ‘나귀를 타신 메시아’는 우리의 부정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그 욕망을 정화시켜서 그분처럼 낮아지고 섬기며 죽는 길로 가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4 thoughts on “마가복음 11장 1-14절: 나귀를 타신 이유

  1. 나귀를 타고 성전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본 모습을 통해 주시는 말씀이 내 안에 있는 모든 욕망과 허영를 직시하게 하시고 허름하고 낮은 곳에서 주님을 섬기는 믿음을 주시고 세상적인 눈에서 벗어나 하늘나라를 보며 주님을 따르는 믿음을 기원합니다.
    형식만 무성한 예배나 찬송이 아닌 순수한 사귐의 예배로 주님을 찬양하게 하시고 늘 깨어 기도하기를 힘쓰게 하십시요 주님.
    오늘 주님의 겸손을 내 삶에 실천하게 하루가 되게 도와주십시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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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무 질문도 하지않고 나귀를 선듯 내어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영혼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을 위해 몸과 마음을
    주님가시는 길에 깔기를 원합니다. 이웃과 함께 성령의 열매를
    맺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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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주님, 겸손하게 나귀의 등을 빌려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행차는 온 인류 역사와 전세계를 향하여 선포하시는 참된 평화의 길이 무엇임을 선포이신 것을 믿습니다. 주님만이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주님 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실존과 사회생활에 참된 평화를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헤엄쳐야할 평화의 강이십니다.주님의 의와 사랑과 진리가 참된 평화를 위하여 흐르게 하옵소서. 주님과 함께 세례를 통하여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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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예루살렘의 동대문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예수님…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스타”가 나타나기를, 우리 앞으로 스타가 지나가고 나와 눈을 맞춰 주기를 기다립니다. 몇 시간이고 기다립니다. “실제로” 스타를 보는 일은 두고두고 자랑할 일이 됩니다. 예수님은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도 쫓아내셨습니다.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가르침을 말하고, 권세자한테 굽실거리지도 않고 천한 이들을 무시하지도 않는 좋은 선생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니 이제 세상이 크게 달라질 일만 남았습니다. 기대감과 흥분이 가득합니다.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은 성전을 둘러보십니다. 무엇을 보셨을까요. “모든 것을 둘러보신 후” 다시 베다니로 가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군중 속에 나를 놓고 상상해봅니다. “스타”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이 궁금하고,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며 해석합니다. 이 당시로 가 있는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예수님한테 실망하게 될겁니다. 다른 세상을 만들어주지 않은채 힘없이 처형당할 뿐입니다. 이건 뭐지?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는지 아는 오늘의 나는 답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타가 아니셨다고, 로마제국을 무너뜨리는 장군이 아니셨다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올리는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셨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나와 내 제국과 내 성전의 죽음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을 받는 창조의 첫 순간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같은 본문을 읽고, 같은 절기를 지나가지만 나는 작년의 내가 아닙니다. 새로운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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