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7편: 선택의 이유

해설:

이 시편도 역시 추수를 감사하며 예배 드릴 때 부르는 찬송입니다. 시인은 아론 제사장의 축도(민 6:23-26)를 기도로 올립니다(1절). “주님의 얼굴을 환하게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어서”라는 기도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막힘없이 경험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예배란 이러한 관계를 회복하자는 것이며 또한 그런 관계를 즐기자는 뜻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온 세상이 주님의 뜻을 알고 모든 민족이 주님의 구원을 알게”(2절)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을 통해 만민이 구원받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의 은혜와 축복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계속하여 다른 민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립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주님을 찬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3절). 주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하시며 모든 민족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모든 민족이 알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4절). 그렇게 되면 모든 민족이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5절). 

시인은 다시 추수에 대한 감사의 기도로 돌아 옵니다. 지금 오곡백과를 풍성하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6절). 그러므로 온 땅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7절).

묵상: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만 축복하시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한 민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복을 받았다면 그것은 모든 민족에게 복을 받는 길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했다면 그것도 역시 모든 민족에게 보여주시려는 본보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백성으로서의 그 사명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 시편은 그런 뜻에서 지어졌고 불려졌을 것입니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제사장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기억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 백성으로서의 사명은 망각하고 그것을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에게 주어졌던 선택이 취소되고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 백성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대신한 새로운 언약의 백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혹시나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만민을 위한 우리의 사명을 기억하고 살고 있는지 물어 보아야 합니다.

4 thoughts on “시편 67편: 선택의 이유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께서주신 축복에 취해 자신들의 사명감을 잊은 것 같이 나도 나의 구원에 만족해 주어진 사명들을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살펴주시고 믿는 자들이 감내해야하는 목슴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한시도 잊지않고 깨어 기도하기를 간구합니다.
    이 땅에서 오곡백과를 즐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무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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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먼저 영의 오곡백과, 성령의 열매를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하신 세상의 오곡백과가
    교만하게 만듭니다. 주님과 성도와 귀하고 긴밀하고 깊은 사귐을 먼저 허락해 주시고
    이웃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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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단기 선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는 복된일을 계속하게 하옵소서. 단기선교에 참여하는 성도들을 축복하여주옵소서. 그들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을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전파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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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오늘 시편은 모든 민족들이 주께 찬양드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는 나와 타인의 구별이 뚜렷했습니다. 나는 나, 너는 너. 나에게는 있고 너에게는 없고. 나는 옳고 너는 틀리고…식입니다. 인생사를 겪다보니 그 구별이 흐려집니다. 타인에게서 나를 보는 때가 많습니다. 다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내 것도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도 내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구원 받아 기쁜 것이 나로 그치면 기쁨 또한 그 자리에 멈춰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큰 사람이 선교사로 전도자로 먼저 나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종교를 가르치고 교화 시키는 일이 전도가 아닙니다. 남의 처지에 나를 놓고 생각할 수 있다면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첫 발자욱을 뗄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감사 찬양하는 하루를 살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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