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9장: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해설: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으면 모든 가축이 병들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라 하십니다(1-3절). 이번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은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4절). 다음 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전염병이 돌아 이집트인들의 가축이 모두 죽어 버립니다(5-6절).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은 한 마리도 죽지 않은 것으로 확인 하고서도 여전히 고집을 부립니다(7절).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재를 두 손에 움켜 쥐고 바로 앞에서 공중에 뿌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것이 이집트 사람들에게 악성 종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하십니다(8-9절). 모세와 아론이 그 말씀대로 하니 이집트 사람들과 짐승에게 악성 종기가 생겨납니다(10절). 그동안 모세와 아론에게 맞서 싸우던 이집트 마법사들의 몸에도 종기가 생겨납니다(11절). 하지만 바로는 굴복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가 여전히 고집을 부리게 하셨으므로”(12절)라고 적습니다. 다섯 번째 재앙에 이르기까지는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바로에게 전할 말씀을 주십니다(13-14절). 하나님은 강력한 재앙으로 한 번에 바로와 그 백성을 멸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15절).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견딜 만한 재앙으로 바로의 마음을 돌리려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 하나님은 “온 세상에 나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16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바로와 이집트 백성을 괴롭히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런 재앙을 겪는 이유는 바로의 고집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박으로 징계하겠다고 하십니다(17-19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치켜 드니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엄청난 우박이 천둥과 번개와 함께 쏟아집니다(22-25절). 이번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고센 땅에는 우박이 내리지 않았습니다(26절). 일이 이쯤 되자 바로가 모세와 아론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번에는 내가 죄를 지었다”(27절)고 인정합니다. 그리고는 우박이 그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주겠다고 말합니다(28절). 모세는 일단 바로의 말대로 하겠지만 그가 다시 변심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대답합니다(29-30절). 모세가 성 바깥으로 나가 주님께 손을 들어 기도하니 우박이 그칩니다(33절). 모세의 예견대로 우박이 그치고 나자 바로는 “다시 죄를 지었다”(34절)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와 그 신하들은 또 다시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7장부터 10장까지 계속되는 열 가지의 재앙 이야기를 한 자리에서 읽으면 그 모든 일이 짧은 시간 안에 연속하여 일어난 일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앙과 재앙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점이 많습니다. 예컨대, 다섯 번째 재앙으로 인해 이집트 사람들이 기르던 가축이 모두 죽었는데,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재앙 이야기에서 가축이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그렇다면 다섯 번째 재앙 후에 상당한 시간이 지나 여섯 번째 재앙이 일어났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 저자는 일어난 일의 핵심만을 전해 줍니다. 오늘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행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열 가지 재앙은 수 개월 혹은 수년 동안에 시차를 두고 일어난 일로 생각하고 읽어야 합니다.

묵상:

바로는 비록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세와의 대결을 통해 그 하나님의 임재를 목격했고 그분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권과 자존심을 내려 놓고 하나님 앞에 항복해야 한다는 부름을 내면에서 느꼈을 것입니다. 그 부름을 거부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합니다. 성경에서 “여린 마음”은 하나님에게 예민한 영혼을 가리키고, “완악한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 무감각해진 영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재앙의 강도를 점점 높여 가면서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 보여 주셨고, 바로는 하나님의 임재를 무시하고 외면하기 위해 마음의 완악함의 강도를 높여갔습니다. 바로는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 저자는 다섯 번째 재앙까지 바로가 스스로 그의 마음을 굳게 만들어 하나님의 부름을 외면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만, 여섯 번째 재앙에 이르러서는 “주님께서 바로가 여전히 고집을 부리게 하셨다”(12절)고 설명합니다. 다섯 번이나 거듭하여 바로가 그의 마음을 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사라졌습니다. 그가 마음을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 선 것입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은 그 마음을 죄에 내버려 두십니다. 이제는 그의 악을 통해 하나님의 선을 빚어내시는 방법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 thoughts on “출애굽기 9장: 아직 기회가 있을 때

  1. 오래동안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주님은 심판의 주님 이십니다.
    주님의 세미한 음성에도 주저하지않고 순응하는 영적 민감 함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웃과 함께 세상에 주님의 인내 하시는것도 끝이 있음을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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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주님의 계속 된 말씀에 더 이상 핑개를 대지않고 열심히 전하는 모세와 아론이 있는가하면 하나님이 누군지 인지한 바로의 불통같은 고집을 보며 내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이 수없이 나한테 말씀해 주셨는데도 불통을 부린 지난 삶을 이제 내려놓고 온전히 주님의 길을 따르려고 기도합니다.
    이제라도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매사에 주님과 상이하며 주님의 지혜로 매듭을 풀어나가는 방정식를 주시고 제사보다는 순종으로 섬기도록 이끌어 주십시요.
    주님의 임재가 오늘 하루도 지배하기를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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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우리는 세상의 권세와 권력을 잡은 자의 완고한 고집과 불통을 현실 역사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한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나 자신은 그렇지 않은지 두려움으로 돌이켜 보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손안에 빠져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나자신의 죄와 불신앙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잃지 마옵소서. 오직 주님의 자비와 은혜만을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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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성경이 어려운 것은 오늘 같은 출애굽 이야기들 때문입니다. 나이가 50대 이상인 사람이라면 찰톤 헤스톤과 율 브린너가 그려내는 출애굽 장면이 아주 익숙할 것입니다. 재앙의 마지막 단계로 홍해가 쩌억 갈리고 이집트 말과 병사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던 장면도 기억할 것입니다. 헐리웃 영화가 칠해놓은 색을 지우고 빼고, 묵상할 때 방해 받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하니 오락이었던 영화감상이 도리어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이처럼 변하지 않아 여러 재앙을 받게 되는 것, 그것도 바로 혼자 감당하는 괴로움이 아니라 이집트 집집마다 재앙이 찾아 오고 짐승까지 목숨을 잃는 일들을 이해하기 참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롯이 면제를 받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죄와 벌의 상관관계가 모호하기도 하지만,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양자대결도 일방적이기만 합니다. 우화로 읽어야 할까요. 신화의 한 버전일까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백성의 건국 프레임일까요.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이 성경책이라는 데 답이 있다 싶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으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책입니다. 성경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출애굽기는 애굽을 빠져나온 히브리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으면서 걸리고, 부담되고, 희미하고, 불편한 때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보려고 합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과 본문이 전하는 하나님을 비교도 해보고, 나의 개인적인 하나님과 성경이 전하는 시대의 하나님을 비교해 봅니다. 바로가 경험하는 하나님과 히브리 백성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이 다릅니다. 낮과 밤처럼 다릅니다. “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하면 답답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얻은 유익 가운데 이 답답함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이나 말씀이 이해되지 않고, 또 해설이나 설교를 듣고 흔쾌하게 넘어가지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께 내 답답함을 아뢸 수 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용납하심을 믿을 수 있는 한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앞뒤가 맞는 스토리인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음을 깨닫는 만큼의 복이면 충분합니다. 그냥 믿으라던 교회 선생님들의 답이 완전히 성의없는 답은 아니었나 봅니다. 알고 믿는 사람이나 믿고 아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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