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5편: 오늘과 영원

해설:

이 시편도 초막절 같은 축일에 불렀던 찬양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너라, 우리가 주님께 즐거이 노래하자”(1절), “찬송을 부르며 그의 앞으로 나아가서, 노래 가락에 맞추어, 그분께 즐겁게 소리 높여 외치자”(2절), “오너라,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6절), “오늘, 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7절) 등의 구절에서 그런 암시를 발견합니다. 회중이 성전으로 행진해 들어가면서 불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경배를 요구하면서 시인은 그 이유를 밝힙니다.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참된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며(3-5절)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7절).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높여 경배하며 거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8-11절). “므리바에서처럼”(8절)은 출애굽기 17장 1-7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리키고, “맛사 광야에 있을 때처럼”은 민수기 20장 2-13절에 기록된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불신하여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그 이전에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행동을 무수히 보았음에도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9절)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1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다시 들려 주시는 이유는 “오늘”(7절) 예배하는 사람들도 동일한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묵상:

히브리서 저자는 이 시편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그는 7절의 “오늘”이 매일 주어지는 현재의 시간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히 3:13)라고 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각자의 ‘오늘’에 새롭게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들은 말씀으로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받아 먹었던 만나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날그날 새롭게 받아 먹어야 할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의 예배는 우리를 신실한 믿음 안에 머물러 살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우리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영적 마약처럼 우리를 소모시킬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안식”(11절)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합니다. 광야에서 유랑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정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종류의 안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마친 후에 안식에 들어가신 것처럼 영원하고 완전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주실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마치고 쉬신 것과 같이, 그 사람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씁시다”(히 4:10-11)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어서 하나님 품에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시간은 오늘뿐입니다. 오늘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예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천지를 지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뿐입니다. 그렇게 예배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안식을 누리며 안식을 전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 때 오늘이 영원으로 이어지고 영원한 안식을 선물로 받습니다.  

3 thoughts on “시편 95편: 오늘과 영원

  1. 주님 안에서 평화와 기쁨을 늘 찬양해야 하는데 종종 내 자신 안에서 꿈틀대는 불평과 불만이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순간 순간을 보며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닭게 하는 아침입니다.
    므리바와 맛사 광야에서 저지른 이스라엘의 불평과 불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반면교사가 되어 주님 안에서만 나의 기쁨과 평안을 찾게 하시고 늘 찬양과 예배로 주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무릅꿇고 경배하며 찬양하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준비합니다.
    주님이 나의 반석이며 요세임을 찬양하는 하루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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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온 천지만물의 창조주 이시고 모든 피조물에 주인 이심을 고백합니다.
    온 천하 만물로 부터 찬양을 바드시기에 합당 하신 분이십니다.
    저희들의 가야할 길을 말씀으로 인도해주시고 사귐의 소리로 매일 아침
    준비시켜주심에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이웃과 더불어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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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행하신 온갖 기적과 은혜를 직접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을 시험하며 고집을 부린 것은 무슨 까닭에서일까요. 우리에게 있는 죄성 중 교만에서 흘러나온 거짓 겸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자기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대표적인 것이 낮은 자존감 low self-esteem 이고, 이것이 인격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나중에 그 잘못된 기반을 바로 세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 났다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한편의 축과 자기는 가치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반대의 또 한 축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중심을 잘 잡고, 자신의 분수를 알며 균형을 이룰 줄 알면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인데 그렇지 못할 때, 어느 한 축으로 많이 쏠려 자기를 보는 눈과 타인을 보는 눈 또한 왜곡된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보는 시각까지 합하면 심리적인 측면 뿐 아니라 영적인 상태 까지도 불안정하고 멍한 상태가 됩니다. 수고했다고, 멋있다고, 잘했다고, 예쁘다고…아주 가끔은 인사치례의 수준으로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진심을 담아 격려와 감사로 그런 말을 하면 유별나게 “겸손”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겸손을 보고나면 교만한 답을 들은 것과 거의 비슷하게 불편해집니다. 듣고 보니 칭찬인 것 같은데 욕이었네…하는 경우와 비슷한겁니다. 지나가는 일회성 경험이기도 하지만 그런 말과 태도가 계속되는 사람이라면 그는 건강하지 않은 자존감과 자아인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억압 속에서 노예로 살던 무리가 하나님의 총애를 받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된 것은 “복권 맞은 행운”을 백만배로 곱한 행운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무리가 만난 하나님은 그들이 이해하던 여러 행운과 사뭇 달라서 적응이 안되는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굳어 열리지 않을 때, 더 넒게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쉽게 이해되는 점만 보려고 할 때,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지우려들 때, 이 때가 하나님 을 시험하고 고집을 부리는 때라고 내 언어로 바꿔 생각해봅니다. 교만의 여러 모습을 다 버리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그저 아이처럼 기뻐하는 마음으로만 받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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