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장: 흔들리지 않는 터전

해설: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그렇기에 새 언약의 일꾼으로 일하는 중에 오해와 모함과 비난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1절).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2절) 때문에 비판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을만큼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힘써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신”(4절)이 그들의 마음의 눈을 가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6절)을 이미 주셨습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은 그 빛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보물을 담은 질그릇”(7절)이라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인간 존재는 질그릇처럼 가치 없고 깨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비쳤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영광의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도 주셨습니다. 그 복음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입니다(7절).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믿는 이의 삶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질그릇같은 우리 존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영예이며 또한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고난과 환난과 박해가 있어도 움츠러들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며(8절) 버림받지 않으며 망하지 않습니다(9절). 외적으로는 손상을 입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질그릇으로만 산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만, 이제는 더 이상 질그릇이 아니라 “보물 그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10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10절) 하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예수님이 당한 고난과 성격 상 같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고난 중에 그와 함께 하셔서 당신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십니다(11절).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이 전해집니다(12절). 

그 옛날 시편 저자가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고백한 것처럼, 바울도 역시 고난 중에 믿음에 근거하여 증언합니다(13절). 그의 믿음은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 주시리라는 것”(14절)에 대한 믿음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견디며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15절).

그렇기에 바울 사도는 낙심하지 않습니다(16절). “겉사람” 즉 질그릇 같은 육신은 낡아가지만 “속사람” 즉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은 영혼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당했고 또한 당하고 있는 고난을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17절)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당한 고난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또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17절)을 믿고 또한 소망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것만이 진실로 영원한 것입니다(18절).

묵상:  

바울 사도는 여기서 두 쌍을 대조시켜 보여줍니다. 하나는 “겉사람과 속사람”입니다. 겉사람은 질그릇에 비유 했고 속사람은 보물에 비유 했습니다. 겉사람 혹은 질그릇은 자연인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겉사람이 전부인 사람 혹은 질그릇으로만 사는 사람에게는 육신이 전부이고 물질이 전부입니다. 반면, 겉사람 혹은 질그릇에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치면 보물 그릇이 됩니다.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비록 우리 존재의 가치는 진흙과 다름 없지만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므로 우리는 무한대의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믿는 사람의 자존감의 근거는 그를 구원하시고 그와 함께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영원을 믿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려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질그릇으로만 사는 사람에게는 일시적인 것만 의미가 있습니다. 영원한 세계는 그에게 닫혀 있습니다. 반면, 보물을 가진 사람은 영원한 나라를 믿습니다. 영원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보고 믿는 사람은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바울 사도는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10절)라고 말할 정도로 고난을 당했지만, 그것을 “일시적이고 가벼운 고난”(17절)이라고 불렀습니다. 

겉사람으로 일시적인 것들에 매어 사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인생입니다. 믿음은 속사람으로 영원한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삶에는 놀라운 능력과 비밀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터전에 서 있는 것입니다. 

4 thoughts on “고린도후서 4장: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질그릇같은 겉사람에 주님의 영광을 비쳐주시어 주님의 비밀이 담긴 속사람으로 새롭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세상의 성공을 쫓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추구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일시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의 미련을 떨쳐내고 영원한 생명의 빛을 향해 뚜벅 뚜벅 걷는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주님 만날 날까지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이겨내는 믿음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구합니다.
    주님의 영으로 새로와 져 주님 쓰시기에 합당 한 그릇으로 빗어지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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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둘도 없는 보물을 구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것을 포기하는 지혜를 원합니다.
    육신은 비록 지치고 쇠약해 가지만 하나님을 아는 믿음은 날로 충만하도록
    기도합니다.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낙심하지않고 이웃과 함께 예수님의
    얼굴을 삶으로 비추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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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어야 산다는 역설의 논리를 믿고 행하는 삶인 것 같습니다. 내가 죽지 않는 신앙은 부끄러운 일을 할 수 밖에 없고 자신과 남을 속이며 그로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혼잡하게 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2절).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것이 빛의 창조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로인해 혼미하고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는 가장 먼저 우리 마음에 복음의 빛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 빛을 가진 자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는”(8-9절)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주님을 믿게 되면 얻게 되는 놀라운 축복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축복은 죽어야 산다는 역설의 논리를 깨달을 때 가장 빛을 발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앙인들의 삶이 부와 장수와 번영만을 추구하여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것에 맞추어진 가시적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그는 우겨쌈을 당할 때 답답한 일을 당할 때 박해를 받을 때 거꾸러뜨림을 당할 때 스스로 무너져 버리는 초보적 신앙 밖에 안될 것 같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 축복받아 모든 것이 형통하다는 번영신앙을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고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방법과는 정반대의 신앙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세상의 잣대로 결코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세상적인 안목으로 볼 때 일평생 고생하고 박해 당하고 목베임까지 당했던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세상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한다 할지라도 사도바울과 같이 행복했던 신앙인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했던 신앙이었습니다. 그가 죽어야 산다는 역설적 논리를 사랑했던 이유는 날마다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의 기쁨을 누렸기 때문임을 깨닫게 됩니다.

      번영적 신앙이 세상의 부를 이룰 수 있다면 죽음의 신앙은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타락하고 기술적 혁신이 오히려 빈부의 차를 더 심하게 갈라놓은 이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죽어야 사는 신앙의 기본을 잊고 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만 잘되면 된다는 무차별적 생각이 복음의 빛으로 재창조된 우리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빛에 문제가 아닌 혼미한 나의 마음으로 인해 복음의 빛이 반사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신앙적 삶을 현실의 결과로 연결하는 잘못이 우리의 모습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모든 것이 형통하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형통하기 위해서 말씀대로 살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사랑의 관계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이 아닌 그 어떤 이유도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 나타나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삶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혼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죽어야 산다는 역설의 논리가 매일 나의 삶속에 확인되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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