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장: 보라, 새 세상을!

해설:

앞에서 “보이지 않는 것” 즉 “영원한 것”(4:18)에 대해 언급한 바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소망을 밝힙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1절)은 우리의 육신적인 생명을 의미하기도 하고 물질 세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육신과 물질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의 일부입니다. 지금 우리는 육신과 물질 세계만을 보고 있지만, 마지막 날이 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차원으로 통합될 것입니다(2-4절).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것은 물질 세계가 영원한 나라에 “삼켜지는”(4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그 세상이 있음을 알려 주셨고 또한 경험하게 하십니다(5절).

이러한 믿음과 소망이 있기에 바울은”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6절)라고 고백합니다. 육신 가운데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을 떠나”(6절) 사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으로는 주님과 함께 살고 있지만 완전한 동거는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에야 우리는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7절)라고 말합니다. 육신과 물질이 아니라 영혼과 하나님 나라가 그에게는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8절)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그가 겪고 있던 그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염려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8절)라고 말할 정도로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분명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육신의 목숨이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에 있습니다(9-10절).

11절부터 바울 사도는 다시금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의 관계 문제에 대해 말합니다. 2장 12절부터 5장 10절까지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순수하고 진실하게 살고 있는지를 밝혔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 주기를 바랍니다(11-12절). 그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아 왔고 또한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13-14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5절). 바울 사도는 그 마음으로 살아 왔고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헌신해 온 것입니다.

그는 육신과 물질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16절)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은 그의 육신적이고 물리적인 환경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도 과거에는 예수님을 “육신의 잣대로”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다. 육신과 물질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으며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17절)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참되게 믿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18절).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관계를 고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셔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19절). 그것이 복음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 하라고 권고합니다(20절).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믿는다는 것은 육신과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영원한 차원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육신적인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고, 우리 모두의 존재가 변화하고, 시간이 영원에 삼켜지는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모태에서의 9개월의 인생보다 태어난 후의 90년 인생이 더 중요하듯,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오는 세상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 세상을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그 세상을 보장해 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영원한 차원, 하나님 나라, 영원한 생명,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은 손에 만져지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는 것으로 산다고 고백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믿음으로 보이는 것들이 더 영원하고 더 분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도 사람이었으니 속상할 때도 있었을 것이고 화가 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망할 때도 있었고 낙심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고 두 팔을 펼쳐 품어 안게 해 주었습니다. 

4 thoughts on “고린도후서 5장: 보라, 새 세상을!

  1. 영혼을 갈망한다고하면서 늘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매어사는 내 자신을 발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갈망하면서도 순간 순간 물질 세계속에서 육신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내 자신을 주님께 고백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되어 옛 것은 벗어 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간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며 이웃을 품는 사랑의 향기가 묻어나 내 이웃과 함께 주님의 나라로 행진해 나가는 하루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새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께 다시한번 감사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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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은혜로 새사람이 되었는데도 뒤를 돌아보고 세상에 한눈을 팔고 있습니다.
    물과 불과 진리와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항상 갱신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절이니 가정은 천국의 대사관입니다, 비록 죄악의 세상에
    살지만 오직 주님 에게만 순종하고 죄가 가정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기도
    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새사람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주님께 기쁨을
    들이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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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새벽의 감동은 새날을 맞이했다는 데 있습니다. 하루의 수고와 고민을 뒤로 하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했다는 안도감이 새벽의 선물입니다. 또 수고하고, 또 고민하는 일을 하게 되어도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날이라는 현실이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아직 완전한 존재, 완전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지만 오늘 몫의 완전을 추구하려 합니다. 오늘 깨닫는 지식은 어제까지 가진 지식보다 새것입니다. 어제도 사랑했지만 오늘 하는 사랑은 조금 더 풍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새로운 태도로, 새로운 존재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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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마음에 닿습니다. 이세상의 삶이 때로는 우리를 혼미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가슴을 찢고 주님 앞에 회개하며 날마다 말씀안에 살려고 하지만 이세상을 넘겨받은 자가 마귀여서인지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바쁜 가운데 말씀을 잊을 때가 있고 세상 사람들과의 부딪침 가운데 신앙인으로서 실수가 생기는것 같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지만 신앙인으로서 온전한 하루 하루의 삶이 결코 쉽지 않은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 삶이기에 나를 찾으신 성령께서 나를 보증하신다는 말씀은 나에게 큰 용기를 줍니다. 넘어질 때가 있지만 실수가 있지만 그때마다 성령께서 나의 힘이되어 주시고 너는 내가 보증한다는 하나님의 메신저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다시 힘을 얻게 되고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나의 의지가 약해질 때가 있고 나의 생각이 혼미할 때가 있지만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 언제가 하나님께서 나의 이 연약한 육신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삼키시는 날에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완벽한 보증이라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의지할 분은 주님이셔야 함을 마음 깊이 받아드립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못박혔다는 것은 나의 어떤 모습도 어떤 형태의 선함과 정직함도 주님 앞에는 부끄러운 것 밖에 안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나의 죄 뿐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주님 앞에 나의 죄를 내어 놓을 때에 주님께서는 주님의 완전하신 의로 늘 나의 죄를 교체해 주셨습니다.

    내가 나를 신뢰할 수 있음과 나의 선한 행실을 어떻게 주님께 자랑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주님께 완전한 항복을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몸안에 있든지 몸 밖에 있든지 주님께서 나의 주가 되시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나” 라는 존재가 주님께 온전히 드려짐을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받아 드리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항복이 나의 온전한 드림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 주신다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10절)

    내가 스스로 하는 선한 행실과 내가 스스로 하는 믿음의 삶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얼마나 볼품이 없을까요. 나의 어떤 행실도 어떤 선함도 어떤 정직함도 주님의 의 앞에 아무런 상급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온전한 항복을 통해 나의 온전한 드림을 통해 주님의 의가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면 그것이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나에게 주실 상급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내가 다른 분들에 비해 조금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생각인가요. 내가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묵상을 하며 모든 예배에 참석하고 열심히 헌신하다 할지라도 주님의 의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주님께 드릴 것은 나의 죄 뿐임을 다시 고백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나를 못박는 온전한 항복을 이루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단 일초의 시간이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일평생의 삶보다 더 값지다는 것을 이아침 마음 깊은 교훈으로 받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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