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9장: 아름다운 헌신

해설:

바울 사도는 계속하여 유대 지방의 성도들을 돕는 헌금에 대해 말합니다(1절). 그는 마케도니아의 교인들에게 고린도 교인들이 이 헌금에 대해 열성을 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알렸습니다. 그들은 이미 일년 전부터 그 일을 해 오고 있으니 그들을 본 받으라고 말했습니다(2-3절). 그것이 헛소문이 되지 않도록 열성을 잃지 말고 완수하라고 권면합니다. 디도와 다른 동역자들을 보내어 그들에게 권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4-5절).

이렇게 권면한 후에 바울은 헌금의 원리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6절)라고 말합니다. “심는 것”은 헌금을 말하고 “거두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축복을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온갖 은혜가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8절)라고 덧붙입니다. “온갖 은혜”는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현세적인 것과 내세의 것 모두를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넉넉하게 헌신하는 사람을 넉넉하게 복주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한 “여러분은 모든 일에 언제나, 쓸 것을 넉넉하게 가지게 되어서, 온갖 선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8절)라고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씨를 마련하여 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 주시고, 여러분의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실 것입니다”(10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적인 풍요 만이 아니라 영적인 성장과 변화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넉넉한 헌신이 더 넉넉한 헌신으로 이어지고(11절), 인색함은 더 큰 인색함을 낳습니다.

둘째, 헌금은 “기쁜 마음으로”(7절)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7절). 헌금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경험하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은 넉넉하게 드리고 베풀게 만듭니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다 주고 싶게 만드는 것이 은혜요 사랑입니다. 헌금은 모름지기 그런 마음에서 나오는 헌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헌신을 기뻐하시며 풍성하게 보답해 주십니다. 그렇기에 믿음으로 드리는 물질은 “잃는 것”이 아닙니다. 드려지는 물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헌금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는”(13절)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하면서도 물질에 인색하다면 그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드리고 나누는 일에 인색하다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생명과 물질과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진실하게 묻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필요를 위해 나의 물질을 넉넉하게 나누기를 힘쓸 것입니다.

넷째, 헌금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그분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11절)라고, “여러분이 수행하는 이 봉사의 일은 성도들의 궁핍을 채워줄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를 넘치게 드리게 할 것입니다”(12절)라고, 혹은 “여러분의 이 봉사의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13절)라고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또한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때문에 여러분을 그리워하면서, 여러분을 두고 기도할 것입니다”(14절)라고 말합니다. 

묵상:

우리는 돈이 근본이 되는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돈이 기준이 되고 목표가 되는 사회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맘몬(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막 6:24). 돈이 대표하는 물질은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영적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유혹이며 도전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돈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돈에 대한 태도가 분명해지지 않으면 영적 생활에서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돈에 묶이지 않고 돈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돈을 사용하되 돈에 사용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넉넉히 경험해야 합니다. 돈을 향한 갈망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돈에서 자유할 수 있고, 그래야 기쁨으로 나의 재물을 드리고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헌금 생활은 아주 중요한 영적 훈련입니다. 돈에서 자유하도록 자신을 늘 일깨워주는 도구입니다. 돈의 종이 되려는 자신을 붙들어 주는 힘입니다. 헌금은 또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더 깊게 체험하게 해 주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3 thoughts on “고린도후서 9장: 아름다운 헌신

  1. 구제와 헌금에 대한 기본 자세를 말씀해 주시는 아침입니다, 마음에 정한대로 해야하고 감정에 따르지말며 억지로 하거나 남의 눈치를 보며 하지 말고 믿음이 분량대로 하라고 주시는 말씀 속에도 많이 심은 사람은 많이 거둔다며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비래해서 받게 된다는 마씀으로 상기합니다.
    네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는 또 돈을 사랑함이 악의 근원이라고 경고하면서도 편안한 삶의 기본이 된다고도 하시는 주님 말씀 앞에 꼭 필요한 만큼의 물질 축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너무 많아 거만하지 않고 너무 적어 궁핍하거는 남은 눈치보는 일이 없도록 필요한 만큼은로 은혜주시고 그 물질들이 주님으 선한 일에 쓸수있도록 맏음을 배가 시켜줄 것을 기도합니다.
    하늘나라에 갈 때는 결코 빈손으로 간다는 진리를 잊지 않게 해 주시기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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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구세주로 부터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은혜를 이미 받았으니
    있는 모든것을 주님께 들이는 지혜가 필요 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으니 감사의 마음을 원합니다.
    나의 주인 이시고 만왕의 왕 이시니 순종하는 믿음을 기도 합니다.
    이웃과 함께 복음을 선포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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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어제는 감사헌금과 구제헌금에 대해 잠시 묵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헌금 뿐 아니라 매일 사용하는 돈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는 그의 부모와 형제까지 잘 알아서 사는 형편이 넉넉했는지 어려웠는지도 잘 압니다. 결혼하여 자기 가정을 꾸린 다음 형편이 어떠해졌는지도 압니다. 그런 친구들이 몇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떠오르는 친구는 직장에서 만난 친구입니다. 그 친구도 우리 식구가 미국으로 온 몇 년 뒤에 캐나다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 친구가 말하는 바로는 잘 살던 친정이 자기가 태어날 때 쯤 가세가 확 기울어져 자기는 떵떵 거리고 살던 시절이 없었답니다. 잘 못사는 집 남자와 결혼했는데 둘 다 좋은 직장을 다닌 덕분에 살림은 넉넉했는데 남편의 눈과 이상이 높아 씀씀이가 헤펐습니다. 나와 같은 직장을 다녀서 그 친구의 생활을 우리 시어머니도 아시는지라 어머니가 나한테 걱정을 말씀하신 적도 여러번입니다. 잘 벌 때 모아야 하는데…남자가 사치스러우면 여자라도 알뜰해야 하는데…캐나다에 가기 전부터 삐걱거리던 가정이 이국땅에서 깨졌습니다. 남편은 딸과 아내를 나 몰라라 남의 나라에 두고 자기만 한국으로 돌아와 잘 살고 있다 들었습니다. 재정 능력이 있는 여자를 만나 새 가정도 꾸몄다 들었습니다. 캐나다에 남은 모녀는 참으로 힘겹게 살았습니다. 형제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게다가 헤어진 남편이 한국에서 산다니까 아예 한국으로 들어올 생각 없이 추운 이국 땅에서 어렵게 어렵게 모녀가 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모처럼 통화를 했는데 사는 형편이 나아질 길이 없습니다. 친구의 건강도 많이 나쁘고 딸도 생활이 고단합니다. 딸의 결혼 생활도 순탄치 않아 몸과 마음이 얼마나 지쳐있는지 모릅니다. 스스로 극빈자층 수준으로 분류된다는데 평소에 “미국에선 돈이 아예 없으면 나라가 다 먹여주니까 괜찮아”하던 것이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미국보다 캐나다가 더 어려워보였습니다. 그 친구와 통화하는데 교회와 믿음이 안 나왔을리 없습니다. 본인은 뜨뜨미지근한 신자였지만 헤어진 남편쪽은 몇 대째 믿는 집안이었고, 지금은 안보고 사는 시어머니는 기도로 아들들을 키웠다고 했습니다. 사위도 이민 교회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인데 결혼을 캐나다 정착의 수단으로 보는 사위 자신과 사위 부모인지라 딸의 결혼도 실제로는 끝난바 다름없습니다. 이러니 교회를 열심히 나간다거나, 믿음으로 참으며 견딘다는 것이 잘 될 수가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 왜 난 안 믿어질까…왜 하나님은 잘 믿지 못하게 두실까…소리를 여러번 했습니다. 자아가 깨지지 않는다고,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에서 벗어나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 우리는 정말 “팔자대로 사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찬은 팔자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크리스찬은 믿음이 팔자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 친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간직하자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자고 했습니다. 매일 새로 눈을 뜨고, 일주일에 며칠이라도 나오라고 불러주는 일터가 있으니 다행이라고, 딸을 위로하기 위해 또 정신을 차리고 밥을 지어 먹이는 엄마로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또 믿자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 같지 않을 때에도 우리를 지키는 것은 믿음이란 것을 확인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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