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 19-47절: 영원한 생명

해설:

앞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17절)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다”(18절)는 이유로 그분을 더욱 박해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에 대해 좀 더 부연할 필요를 느끼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인 자신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같다고 하십니다(19-20절).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 것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에 자신이 행할 수 있었습니다(21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을 당신처럼 섬기게 하도록 심판하는 권한을 모두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22-23절). 

그러므로 한 사람의 운명은 아들이신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을 듣고 또한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24절)고 단언하십니다. 죽고 나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순간 그 생명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다”(2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살아 있어도 실은 죽은 것입니다. “음성을 듣다”라는 말은 “듣고 응답하다”는 뜻입니다.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살 것이다”는 참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즉시로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27절).

하지만 이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28절)이 모두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옵니다. 예수께서 영원한 왕으로 다시 오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때를 말합니다. 그 때가 되면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29절)고 하십니다. 여기서 “선한 일”은 단순한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의 근본은 하나님에게 돌아와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반면 “악한 일” 중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인생을 죄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십니다(30절). 그러면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언해 주는 증인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증인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성하라고 주신 일들”(36절)입니다. 지금 그분이 하고 있는 일들을 제대로 본다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증인은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37절). 하나님이 친히 증언해 주시는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증언을 믿지 않습니다(38절). 셋째 증인은 성경입니다(39절). 모세뿐 아니라 성경 전체는 메시아로 오실 그분에 대한 증언입니다(46절). 성경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을 거룩하게 여기고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지만 그 예언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47절).

묵상: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을 향해 ‘아바’라고 불렀습니다. 현존하는 문헌 증거로 볼 때 예수님 이전에는 누구도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바’라는 호칭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독점적인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은 별개이지만 또한 하나이듯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런 관계에 계십니다. 그와 같은 인격적 합일 상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하나님은 예수님과 같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드러나셨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언제나 작가와의 관계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됩니다. 모든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자연 상태를 두고 “죽었다”고 표현하십니다. 육신적인 생명만으로는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생명의 근원에 연결되어 있어야만 진실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가 다시 생명의 근원에 연결되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죽은 사람들은 다시 일으킴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3 thoughts on “요한복음 5장 19-47절: 영원한 생명

  1. 삼위 일체를 다시 확인하면서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위에 굳건한 영생을 누리는 삶으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새로운 삶에서는 과거 죽었을 당시으 삶을 되풀이 하는 일이 없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위선이나 죄악에 유혹 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구별된 언행으로 주님의 자녀임에 부족함이 없기를 간구합니다.
    영생을 감사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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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저희들을 살리기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성경을 통해 세례 요한을 통해 주님의 사역과
    표징을 통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도록 인도하신 성령께 찬양을 드립니다.
    오직 보혈만이 아버지 품으로 갈수있읍을 이웃과함께 세상에 선포 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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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요한은 여러번 강조합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조상 때부터 고백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하나님과 연결해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뚜렷한 한국인의 정체성이 없습니다. 백의의 민족? 단군의 자손?? 유대인들은 정체성 면에서 가장 앞에 서도 될만큼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을 예수님이 꾸짖으십니다. 모세도 너희를 고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 (42절)고 진단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처방은 니고데모에게 하신 처방,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광야를 기억하고, 조상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당신은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 오셨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문법은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긍정법입니다. 당신의 일을 보고 믿는 사람은 이미 영생으로 옮겨졌으며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노력이나 노동의 값을 내고 받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긍휼함 속에서 거저 받은 선물입니다. 은혜의 선물, 마르지 않는 우물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 들인 순간에 단 한 번으로 나의 인격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에서 나온 병아리가 병아리로 정지해 있지 않듯, 나도 하나님의 딸로 계속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병아리가 닭이 되기 위해 알로 다시 들어가 닭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듯, 니고데모도 나도 매일 매일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오늘 하루만큼 성장할 따름입니다. 남가주와 태평양으로 구성된 여선교회 연회가 드리는 150 주년 기념예배와 연례 모임이 오늘로 다가왔습니다. 처음부터 계획한대로 일사분란하게 진행되는 것은 내 머리속에서만 일어날 뿐 실제로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드라마를 통해 예배를 올리게 됩니다. 부족하지만 오직 사랑의 고백을 올리는 예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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