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새로운 사명

해설:

“디베랴 바다”(1절)는 갈릴리 호수를 가리킵니다. “부산 앞바다”라는 말처럼 디베랴라는 동네 근처 호수를 가리킵니다. 시몬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러 호수로 나갑니다. 하지만 밤이 새도록 헛수고만 합니다.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새벽이 밝아오자,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로 다가 오십니다. 예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잡을 것이다”(6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했더니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때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7절)가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 차리고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 내려 예수님께 달려 갑니다. 다른 제자들은 배를 저어 고기로 가득찬 그물을 끌고 해안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이 해변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벌써 불을 피워 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반가운 마음에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께 달려 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잡은 생선 몇 마리를 가져 오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다시 배로 돌아가 그물을 끌어 올립니다. 그물 안에는 큰 물고기만 153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고기가 잡혔는데도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생선 몇 마리를 가져 오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아침 식사로 인해 그들의 추운 마음은 따뜻해 졌을 것입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따로 불러 내십니다. 해변을 따라 걸으시다가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사랑하느냐”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어의 의미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것과 같이 조건없이,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아가페가 아니라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필레오는 깨어지기 쉬운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저의 사랑은 깨어지기 쉬운 인간적 사랑입니다”라고 답한 셈입니다. 베드로는 가야바의 법정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마음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어린 양떼를 먹여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참을 말 없이 걸어가시다가 예수님은 동일한 질문으로 두 번째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도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다른 말씀 없이 “내 양떼를 쳐라”(16절)고 하십니다. 얼마 후, 예수님은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7절) 그런데 이번에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불안해져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합니다. 이 대답에서도 베드로는 “필레오의 사랑”을 말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의 한계를 주님 앞에 인정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양 떼를 먹여라”고 답하십니다. 

이 대화로써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당신을 부인했던 처참한 실패의 상처로부터 베드로를 회복시키십니다. 그 이전의 베드로는 자신이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 자만심이 가야바의 법정에서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희망을 보셨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할 수 없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에는 비로소 사용할만한 그릇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거듭 아가페 사랑에 대해 물으시다가 베드로가 진실하고 겸손하게 고백하자 필레오의 사랑으로 시작하라고 위로하고 격려하십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께 의지할 때 희망은 시작되기 떄문입니다. 

그리고는 베드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예언하십니다(18절). 그것은 베드로가 순교 당할 것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19절). 그 때 베드로가 돌아다 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20절). 베드로는 그 제자의 미래가 궁금해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1절)고 답하십니다. 다 각각 운명과 사명이 다르니, 다른 사람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비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몫이 주어졌든 상관 없이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몫에 감사하고 그 몫을 지키면 됩니다. 이 말씀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요한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오해했습니다(23절). 바로 그 사람이 이 복음서를 쓴 사람입니다. 

묵상: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의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그분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 매우 크고 중대한 도약입니다. 둘째는 그로 인해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음으로 인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눈을 뜨고 나면, 인생의 의미와 보람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기 전에는 물질과 육신이 전부였으나, 부활을 믿고 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중요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가장 큰 영예요 기쁨이 됩니다. 

그것이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는 부활을 믿음으로 인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사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것은 불행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의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일을 위해 헌신하다가 마지막에 그분처럼 고난 당하고 순교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운명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사랑이나마 예수님께 드리고 그 사랑으로 섬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사랑으로 섬길 때 그가 가진 펠레오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한 사랑을 당신께 내어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낮아져서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 섬김을 통해 우리의 연약한 사랑이 자라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오래도록 살아남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닮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하루하루 이 길을 걸어나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One thought on “요한복음 21장: 새로운 사명

  1. 이성과 경험으로 그늘을 던져 헛 수고를 하지말고 말씀에 순종하는 어부가
    되기를 원합니다. 항상 같이하시는 예수님을 깨닫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머리를 굴리는 위선이 주님의 사랑으로 닮아가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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