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7장: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해설:

때는 아하스가 유다를 다스릴 때(주전 732-716)의 일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와 시리아 왕 르신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유다 왕실에 전해지자 왕실과 유다 백성이 공포에 떱니다. 시리아는 당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 왕을 찾아가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연합군은 아하스 왕을 제거하고 유다에 꼭둑각시 왕을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지만 성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3-7절). 시리아의 힘은 기껏해야 수도 다마스쿠스의 힘이며, 다마스쿠스의 힘은 기껏해야 왕 르신의 능력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에브라임 즉 북왕국 이스라엘도 육십오 년 안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8-9절). 그러니 믿음 안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유다가 절대 불리한 상황이어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언이 사실이라는 징조를 요구하면 보여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10-11절). 하지만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지도, 하나님을 시험하지도 않겠다고 강하게 부정합니다(12절). 강한 부정은 실은 강한 긍정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하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한 가지 징조를 보여 주겠다고 하십니다(13-14절).

그것은 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짓는 것입니다(14절). 그 처녀의 정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정보가 없습니다.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16절)가 되기 전에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황무지가 될 것이며(16절), 남왕국 유다 역시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큰 재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17절). 앗시리아와 이집트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8-20절). 그로 인해 유다 백성은 대부분 죽임을 당하고 그 땅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21-25절).

묵상:

14절에 나오는 “한 징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임마누엘이라는 아들을 낳을 “처녀”는 누구를 의미하는지에 대해 유대 랍비들의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그만큼 이 예언은 모호합니다. “처녀”라고 번역된 히브리말 ‘알마’는 “여인”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기에, 이 여인이 이사야의 아내라는 의견도 있고, 왕비를 가리킨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구약학자들은 이 여인의 정체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습니다. 초대 교인들이 읽고 있던 헬라어 번역 성경에는 ‘알마’를 ‘파르테노스’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처녀”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처녀로 읽으면 그의 정체는 더욱 묘연해집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시자 제자들과 초대 교인들은 그분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샅샅이 뒤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예언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은 14절을 주목했습니다. 이 예언이 이사야가 살아있던 당대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지만,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는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마 1:23). 

그 메시아는 다름 아닌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퇴각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리셨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알고 보면, 이것처럼 안심되고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마지막 숨을 쉬면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 thoughts on “이사야 7장: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1. 예언 자들이 끊어지며 먹통기간 450년 동안 도대체 어디에 하나님이 계신가? 하고 이스라엘의 삭막했던 시기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가 예수님으로 오시는 ” 복음을 통해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그려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 있었지언정 하나님은 늘 내 곁에서 나를 보호하시며 인내하시는 하나님이기에 이번 성탄절기에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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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잘 믿지 못해 망서리거나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에게 표적을 보여 주시려면 어린아이라도 척보면 알만한 확실하고 또렷한 것을 보여주시지 왜 단어의 뜻도 불분명하고 무슨 의미의 메시지인지 모호한 말씀을 하시는가…답답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도 알아듣기 어려운 비유가 있어 이 또한 답답하기도 합니다. 삶이 흑과 백처럼 분명하지 않음을, 정상으로 올라가고 한복판으로 들어가도 그곳은 또 다른 곳의 경계요 변방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때 쯤이면 이런 깨달음 역시 나의 무지를 보여주는 표지판임을 알게 됩니다. “보아야 믿느냐”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신비와 은혜로 가득한 삶을 놓고 내 작은 머리로 알 수 있는 것, 내 좁은 시야 안에 들어와야 보이는 것만 고르고 있으니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조심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라’고 일러주라고 하십니다. ‘두려워 마라’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타다 만, 연기 나는 부지깽이와 같은” 표현이 기가 막힙니다. 공포와 불안이 엄습할 때 이 표현이 떠오른다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요. 희망의 메시지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이미 오셔서 내 안에 계시는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또 기다립니다. 만남의 기쁨을 주시려 오시는 예수님을 또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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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리스도인이 되어 믿음으로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은 바꿀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사건과 세상의 종말과 함께 임하게 될 주님의 재림과 그 시간의 틀 안에서 존재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은 기도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삶의 원칙에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을 구분해 놓으신 것 같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일을 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들을 성실이 준행하는 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내 맘대로 안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고비에서 내가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평소에도 기도를 드리지만 절실하게 기도하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도하는 행위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기도는 하면서 나의 수단과 방법이 나타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나의 기도였다면 그 결과에 대해 순복하려는 마음도 기도하는 자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결과가 비록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기도는 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수단과 방법인 것 같습니다. 아하스도 하나님께 기도는 했지만 자신의 수단과 방법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분은 분명 하나님이시라 하며 주변 강대국에 의존해서 순간의 위험을 모면하려 했던 그 행동은 분명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인의 모습에서는 많이 벗어난 것 같습니다.

    이런 행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기도하고 기다릴 때가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며 기도하는 경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올바른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 이 두 가지 경우를 잘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가 기도하고 기다려야 하는 때이며 언제가 내가 최선을 다하며 기도하는 때인가 입니다.

    그 판단의 기준을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움을 청하는 동시에 다른 강대국에도 손을 벌렸던 아하스의 행위는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아하스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던 것은 좋았지만 그 근본 마음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결단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기도는 했지만 주변 강대국을 찾는 수단도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은 나와는 괸계없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으로 쓰임을 받는 믿음의 존재가 될 것인지 아닐지는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 말씀안에 거하는 삶만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것임을 깨닫게 되며 말씀과 세상이라는 기로에 설 때마다 주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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